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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증권, 경제 이야기

[스압] 초콜릿의 기원과 역사

by luckykorean 2024. 9. 10.

목차

    [스압] 초콜릿의 기원과 역사

    약 천 년 전, 초콜릿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맛볼 수 있는 진귀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초콜릿을 먹은 자들은 중미 열대 우림 속에서 살고 있던 원숭이들이었습니다.

    중부 아메리카 대륙의 무성한 열대 우림은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야생동물들의 세계였고, 또한 아주 작은 코코아 나무가 열매를 맺기 시작한 땅입니다.

    코코아 나무에서 자라는 카카오 열매.

    대부분의 목본식물은 가지에 꽃이 열리고 열매를 맺지만, 카카오 열매는 특이하게도 본 줄기의 거대한 둥치에서도 꽃이 열리며, 거대한 열매 또한 주렁주렁 맺습니다.

    원숭이들은 이 크고 단단한 열매들을 떨어뜨려 깨뜨렸고, 속에 있는 하얀 과육을 씹어 속에 가득한 즙을 빨아먹었습니다.

    카카오 열매 껍질을 깨면 안에 들어있는 하얀 과육과 씨앗.

    그러나 원숭이들은 카카오 열매의 과육을 먹고 쓴 맛이 나는 씨앗을 뱉어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카카오 나무들은 원숭이들을 따라 영역을 넓히며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초콜릿을 먹은 사람들

    약 5300년 전,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 언제였을지도 모르는 어느 날, 한 사람이 원숭이들이 카카오 열매를 먹는 모양새를 보고 똑같이 따라했습니다.

    단단한 껍질을 깨어, 속에 있는 부드럽고 기름진 흰 색의 과육을 빨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원숭이들과 똑같이 쓴 맛이 나는 씨앗은 뱉어내 버렸습니다.

    그들은 쓴 씨들을 한 곳에 모아 버렸는데, 어느 날 완전히 말라붙은 씨앗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려다 불 붙은 카카오 씨앗에서 매우 고소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코코아 과육 뿐만 아니라 쓴 맛의 코코아 씨앗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과육을 제거하고 깨끗이 세척한 코코아 씨앗 위에 바나나 껍질을 덮어 며칠 숙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숙성된 씨앗을 뜨거운 햇볕에 널어 며칠간 말렸습니다.

    그리고 잘 숙성되고 바싹 마른 씨앗을 불에 잘 구웠습니다.

    적당히 구워진 씨앗을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들었고, 이것을 물에 개어 각종 향신료를 첨가한 뒤 음료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최초의 초콜릿에 '초콜-하(Chocol Haa)'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수천년을 걸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가장 초기의 카카오 빈 그라인딩 방법이자 최초의 초콜릿 음료 제조과정.

    이렇게 만들어진 '초콜하'는 매우 쓴 맛이 나지만 원기를 북돋아주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게 해주는 신성한 음료로 여겨졌습니다.

    코코아 나무 한 그루에서 얻을 수 있는 초콜릿 씨앗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코코아 나무를 인위적으로 심어, 코코아 농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코아 나무는 새싹일 때 너무 강한 볕이 들지 않도록, 충분히 그늘을 조성해 주며 세심하게 키워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을 모아볼 때, 아마도 최소 5천년 전에는 중미 지역에서 본격적인 코코아 농업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마야 사회에서 '신의 음료'로 추앙받았던 초콜릿 음료

    코코아 나무를 키워낸 가장 거대한 문명의 사람들은 마야인(Mayan)입니다.

    초콜하, 즉 초콜릿은 그들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마야인들의 왕과 제사장들은 귀한 초콜하 음료를 매일 마시고 싶어했습니다.

    특히 주전자를 머리 높이 들어 흘리지 않고 잔에 따라내어, 풍부한 거품을 만들어 마시는 것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초콜하 음료의 깊은 풍미를 가장 잘 살려내고, 거품이 풍부한 초콜하를 마시는 것이 영적 감각 또한 가장 또렷하게 일깨워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코코아 나무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 곳곳에 코코아에 대한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도자기와 컵, 돌벽과 사원에 코코아에 대한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 보존하려 했습니다.

    코코아 나무의 생육방법부터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야 했는지, 맛있는 초콜하 음료를 만드는 방법, 이것을 마실 때 행했던 예법과 의식, 이것이 얼마나 귀했는지, 이것을 마실 수 있는 신분과 값어치까지 모든 것들을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실제 마야인들이 초콜릿 음료를 마실 때 사용했던 컵. 연대 추정 7~9세기.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소장.

    마야인들은 이 음료를 사랑하여 일상 생활 속 많은 중요한 의식들 속에서 신성하게 여기며 음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초콜릿 음료를 더욱 많이 즐기게 되면서 코코아 씨앗의 가치는 점점 올라갔고, 초콜릿 음료의 값어치 또한 매우 비싸졌습니다.

    마야 사람들 모두가 자주 마실 수 있었던 초콜릿 음료는 더욱 귀해져,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만 마실 수 있게 되고, 종국에는 매우 특별한 날에만 가끔 마실 수 있는 귀한 음료수가 되어버렸습니다.

    한민족이 귀하게 빚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부부의 연을 맺듯, 마야인들은 결혼식 날 신부와 신랑이 코코아 씨앗 다섯 개를 서로 교환하며 증표로 삼고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고대 마야의 꽃병에 새겨진 그림. 중앙에 앉아있는 마야 문명의 통치자가 오른쪽의 시종에게 무언가 엄중히 지시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에 그려진 새까만 색깔의 컵이 초콜하 음료를 담는데 사용했던 초콜릿 전용 컵이다.
    고대 마야인들은 일상 속에서 항상 코코아로 만든 음료를 즐겨 마셨고, 이는 당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수많은 그림, 인형, 토기, 조각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었던 코코아 씨앗은 더욱 귀해지고, 언젠가 부터는 화폐로써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코아 씨앗 열개로는 토끼 한 마리를 살 수 있게 되었고, 코코아 씨앗 백개로는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야인들만의 비밀스러운 레시피가 퍼져나가다

    최초의 초콜릿 음료가 만들어진 지 몇백년이 지난 후, 한 상인 집단이 마야인들의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황제를 위해 세상의 귀한 보물들을 찾아다 바치기 위한 사절단으로, 며칠에 걸친 여정으로 마야인들의 땅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즈텍(Aztecs) 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야인들은 그들과 친선을 교류하기 위해 그들이 가장 아끼선 보물, 귀한 코코아 씨앗과 그것을 쓰고 향긋한 초콜하 음료로 만들어 마시는 레시피를 선물했습니다.

    상인들이 마야인들만의 비밀스러운 초콜하 음료와 제조법을 얻어 자신들의 황제에게 바쳤고, 황제는 이 음료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황제는 술처럼 취하지도 않고,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상쾌하고 개운한 느낌을 주는 이 초콜릿 음료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인 스스로가 즐길 뿐만 아니라 전쟁에 출정하는 전사들에게도 전투 직전 이 음료를 마시게 하여 사기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즈텍 인들이 살고 있는 땅은 코코아 나무가 자라기에는 너무 추운 지역이었기에, 항상 비싼 값을 치르고 마야인들에게서 코코아 씨앗을 사들여 제국까지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아즈텍 제국의 황제 몬테수마(Montezuma)는 특히 비싸고 귀한 초콜릿 음료에 너무 푹 빠져버렸기에, 재정을 조금이라도 더 아껴 항상 왕실 창고에 코코아 씨앗을 가득 채워넣었습니다.

    아즈텍 제국 초대 틀라토아니(Tlatoani, 황제) 목테수마(Moctezezuma) 1세. 여러 언어로 번역되며 발음 전달의 문제로 몬테즈마, 몬테수마 등의 이름으로 변형되어 전해진다.

    한 번은 하루에 50잔이나 되는 초콜릿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초콜릿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그 스스로가 더욱 똑똑해지고 부자가 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코아 씨앗과 가루는 매우 비쌌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초콜릿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초콜릿 음료가 아즈텍 문명에 퍼지면서, 코코아 나무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옛날에, 세상에 초콜릿이 없었을 때, 농업의 신인 케찰코아틀(Quetzalcoatl) 께서 낙원에서 돌아오시며 코코아 나무를 선물로 가져오셨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멕시코 전설 속 농업의 신, 케찰코아틀이 인간들에게 카카오 나무를 선물로 전해주었다는 민담이 전해내려온다.

    사람들은 케찰코아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거대한 신전을 짓고, 그곳에서 초콜릿 음료를 바치며 신에게 기원을 드렸습니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미 대륙에 도착하다

    1519년,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라는 스페인 탐험가가 군대를 이끌고 미 대륙에 도착합니다.

    16세기 미 대륙을 침략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당시 아즈텍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었던 목테수마(몬테수마) 2세의 초상.

    그는 갑옷과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아직 흑요석 등을 이용한 석기시대의 기술력만으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아즈텍 문명을 침략하였습니다.

    몇 번의 전투 끝에 몬테수마 황제는 코르테스와 스페인 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를 궁궐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고 화친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아즈텍 제국의 틀라토아니 몬테수마 2세의 만남을 그린 그림.

    에르난 코르테스는 유럽인 가운데 최초로 몬테수마 황제의 궁에서 초콜릿 음료를 맛보았고, 쌉싸름하고도 향기로운 그 맛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침략자인 그가 화친에 응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대제국을 정벌하여 스페인의 식민지로 삼고 싶어했고, 정복전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으로 건너간 초콜릿 음료에 설탕을 첨가하다

    1528년, 코르테스는 스페인으로 귀국하는 배에 아즈텍 제국의 보물들을 가득 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아메리카 대륙을 정벌하며 얻어낸 귀중한 코코아 씨앗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코르테스는 그의 친구들에게 초콜릿 음료를 맛보여 주었는데, 몇 번의 시음과 실험 결과 이 음료수는 따뜻하게 데우고 설탕을 첨가하여 달콤하게 만들면 더욱 맛있어 진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환상적인 레시피를 자기들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의 대공 필립(Philip)은 도미니카 수도사들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아즈텍 인들에게서 이 음료수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중미(Meso America, 메소 아메리카)를 정벌하여 스페인 대제국을 건설한 펠리페 2세.

    아즈텍 인들은 그들은 소중히 가져온 귀한 초콜릿 반죽을 우호의 선물로서 필립 공에게 바치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성적으로 정력에 좋고, 남성성을 더해준다는 설명은 덤이었습니다.

    필립 공 또한 이 향긋한 음료수에 흠뻑 매료되었고, '이 음료수가 정말 신성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정도로 초콜릿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설탕을 첨가하여 달고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향긋한 신의 음료수, 초콜릿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왕가에서 유행하는 최신 문물이다보니, 전 유럽으로 그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도 순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환상적인 음료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대륙을 건너와야 했던 너무 귀하신 음료수였기에 그 실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었던 유럽의 일부 왕족과 귀족들만이 이 귀한 음료수를 맛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초콜릿을 마셔보았다'라며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La tasse de chocolat. (1768) 장바티스트 샤르팡티에. 이 그림은 펜티에브르 공작의 가족이 초콜릿을 마시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초기 프랑스에서 초콜릿의 사회적 가치를 보여준다. 비싼 초콜릿을 마시는 것이 가족의 부와 지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곧 그들이 모여앉아 비싼 초콜릿을 마시며 부를 과시하는 장소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들은 이를 '카페(Café)'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초콜릿 음료를 쏟아내는 기계가 등장하다

    증기기관이 탄생한 이후,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일일히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했던 많은 비싸고 귀한 물건들이 자동화 과정을 거치며 공장에서 손쉽게 생산되었고, 산업 혁명이 시작되며 귀한 물건들이 흔하고 값싸게 변했습니다.

    초콜릿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미 대륙에서 그대로 수입해온 코코아 씨앗을 기계의 힘을 빌어 건조하여 적당히 볶아, 곱게 갈고 설탕을 첨가해 초콜릿 음료로 만드는 복잡한 과정은 유럽 각지에 세워지기 시작한 초콜릿 공장에서 손쉽게 이루어졌습니다.

    귀하디 귀하여 왕족과 귀족들만 마실 수 있었던 초콜릿 음료를 서민들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대량생산하여 값싸게 만들어내는 장사는 그야말로 일확천금의 사업이었기에, 돈냄새를 맡은 자들은 너도나도 초콜릿 사업에 뛰어들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초콜릿 음료는 공장에서 값싸게 콸콸 쏟아져 나왔지만, 여전히 '신이 내린 음료'로 추앙받았기에 사람들은 이 초콜릿 음료만 마시면 만병이 통치되고 의사를 만날 필요도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가장 초창기의 카페는 약과 음료, 요깃거리와 정보, 술과 부자,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중요한 사교의 장이자 각종 건강요법을 시행하는 공중 의료 보건시설에 가까웠다. 카페의 주인은 숙련된 바텐더이자 바리스타, 또한 약사를 겸업한 것이다.

    영국에서 음료수가 아닌 고체 초콜릿이 발명되다

    1847년, 영국의 초콜릿 사업가 '프랜시스 프라이(Francis Fry)'는 만약 초콜릿이 액체 상태가 아니라 고체였다면 훨씬 더 섭취하기 편하고 팔기에도 쉬울 거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어떻게 초콜릿 반죽들을 단단한 막대 모양으로 성형할 지가 문제였습니다.

    네덜란드(당시 Holland)의 '콘라드 반 허튼(Coenraad Van Houten)'이라는 사람이 해결법을 제시했습니다.

    '프랜시스 프라이(Francis Fry)'(좌)와 '콘라드 반 허튼(Coenraad Van Houten)'(우)

    그는 초콜릿 반죽에서 코코아 가루와 코코아 버터를 분리해 냈습니다.

    프랜시스 프라이는 콘라드 반 허튼이 분리해 낸 코코아 버터를 차갑게 냉각시키면 단단하게 굳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면 단단한 고체 초콜릿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먼저 따뜻하게 녹인 코코아 버터를 초콜릿 반죽과 부드럽게 섞었습니다.

    이 걸쭉한 반죽에 세 숟갈 정도의 설탕을 붓고 네모난 모양의 틀에 넣고 차갑게 식혀 굳혔습니다.

    그 덩어리는 점차 단단하게 굳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고체 초콜릿이 되었습니다.

    프라이는 최초의 초콜릿 바(Chocolate Bar)를 발명한 것입니다.

    1878년 파리 박람회에 출전한 프랜시스 프라이의 초콜릿 홍보 광고(좌), 밀크 초콜릿 제품 '프라이의 다섯 형제들'을 홍보하는 1910년 경의 광고.(우)

    스위스가 초콜릿에 진심을 쏟으며 장인정신을 가지는 이유

    처음에는 매우 순도가 높아 쓰고도 단 맛이 강렬한 초콜릿 바가 생산되었습니다.

    이것을 다크 초콜릿(Dark Chocolate)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뒤 스위스의 양초 장인이었던 '다니엘 피터(Daniel Peter)'라는 사람은 양초라는 존재 자체가 점점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양초 제작자였지만, 훗날 스위스의 전설적인 쇼콜라티에가 된 '다니엘 피터(Daniel Peter)'

    장사는 점점 쇠락하고 있었고, 돈을 버는 것이 힘들어 졌습니다.

    그는 초콜릿 장인 '프랑수아 루이 카이예(François-Louis Cailler)'의 딸 패니(Fanny)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피터의 장인어른이었던 초콜릿 제작자, 프랑수아 루이 카이예(François-Louis Cailler)

    초콜릿 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다니엘 피터는 기존의 다크 초콜릿을 더욱 맛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콜릿에 우유를 섞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유를 섞은 초콜릿을 단단하게 굳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 피터의 초콜릿 공방에서는 많은 연구와 실험이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게 됩니다.

    우유에 풍부하게 섞여있던 물이 원인이 되어, 금방 곰팡이가 피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 옆집에 살고 있던 아기 이유식 제조자 '앙리 네슬레(Henri Nestlé)'라는 사람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처음 우유에서 물을 분리하여 분유로 만들어 초콜릿에 섞는 방법을 제안했지만, 이 또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네슬레의 도움 아래 다니엘 피터는 이유식을 만드는 방법을 적용해 분유가 아닌 연유 상태의 우유와 초콜릿을 섞어 단단하게 굳히는데 성공합니다.

    1883년, 다니엘 피터가 개발한 '밀크 초콜릿(Milk Chocolate)'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 혁신적인 발명품을 개발한 다니엘 피터는 큰 사업적 성공과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레시피를 훔치고자 했고, 밀크 초콜릿을 모방한 제품을 판매하는 가게와 공장, 공방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이 대사건으로 인해 스위스는 초콜릿의 수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니엘 피터의 동업자였던 앙리 네슬레는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독자적인 초콜릿 사업을 펼쳤습니다.

    이후 다니엘 피터의 초콜릿 브랜드는 네슬레와 비슷하게 독자적인 레시피를 가지고 독립한 사업주들로 인해 몇 개의 독립회사로 분열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이 모든 분리된 계열사들은 가장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회사 '네슬레(Nestlé)'에서 통째로 인수하여 하나의 거대한 초콜릿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더욱 달콤하게, 더욱 부드럽게, 다양한 모양으로! 더욱 환상적으로 변해가는 초콜릿

    20세기가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밀크 초콜릿을 더욱 부드럽고 촉촉하면서도 달콤하게 사르르 녹는 식감으로 빚어낼 지 더욱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처음으로, 초콜릿을 큰 롤러 사이에 넣고 압착하여 넓은 쟁반에 편편하게 폅니다.

    그리고 '로돌프 린트(Rodolphe Lindt)'라는 사람이 발명한 거대 교반기에 넣고 매우 부드러워질 때까지 몇번이고 오랫동안 저어줍니다.

    초콜릿 교반기를 발명한 쇼콜라티에, '로돌프 린트(Rodolphe Lindt)'. 발명가 린트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일명 '콘치 기계(Conch machine)'로 알려진 이 기계는 "원치 않는 산미와 쓴맛을 제거하기 위해 가열된 액체 초콜릿을 집중적으로 섞고, 저어주고, 통기시키는 긴 과정"을 자동으로 수행해 주었다고 한다.

    초콜릿은 차갑게 식었다 데워졌다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섞이는 과정에서, 반짝이는 광택을 가지게 됩니다.

    충분히 교반되어 부드럽고 맛있어진 초콜릿은 틀에 담겨 굳혀지고, 상품으로 포장되어 출하과정을 거칩니다.

    오랫동안, 식용 초콜릿은 오로지 단단한 고체 막대기(Bar) 형태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초콜릿 사업가 '밀턴 허쉬(Milton Hershey)'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납작한 네모 막대기 모양을 띄고 있었던 초콜릿들의 통일된 모양이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여겼습니다.

    1907년, 그는 꼭지가 있는 물방울 모양의 새로운 초콜릿의 형태를 고안해냈고, 한 입에 톡 털어넣을 수 있도록 작은 크기와 간편하게 벗길 수 있는 포일(Foil) 포장으로 초콜릿 모양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밀턴 스네이블리 허쉬 (Milton Snavely Hershey, 1857년 9월 13일 ~ 1945년 10월 13일), 그가 개발한 새로운 모양의 초콜릿, 키세스.

    딱딱하게 굳히기 전에는 부드러워 자유로운 모양으로 변형이 가능한 초콜릿이 다양한 형태의 상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왜 허쉬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밀턴 허쉬의 조그맣지만 놀라운 발상은 곧 전 세계 모든 초콜릿들의 모양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세계의 공장들에서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모양의 초콜릿들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 미국의 사탕 공예가였던 '하웰 캠벨(Howell Campbell)'은 녹인 초콜릿에 땅콩, 카라멜, 마쉬멜로 등 온갖 재료들을 넣고 섞는 실험과정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해내기에 이릅니다.

    캠벨은 씹었을 때 굉장히 끈적끈적한(Gooey) 느낌이 드는 달콤한 초콜릿을 개발했고, 이 새로운 발명품을 '끈적끈적 덩어리', '구구 클러스터(Goo Goo Cluster)'라고 이름지었습니다.

    '하웰 캠벨(Howell Campbell)'과 그의 발명품, '구구 클러스터(Goo Goo Cluster)'.

    이것은 초콜릿을 다른 간식과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최초의 시도로, 꽤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같은 해, 벨기에의 약사였던 '장 네이가우스(Jean Neuhaus, '노이가우스', '노이하우스'라고도 발음한다)'는 '쓴 약의 표면에 초콜릿을 얇게 입혀 아이들에게 먹이면 쉽게 약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고, 이윽고 견과류에 초콜릿을 코팅한 새로운 간식을 개발하여 쇼콜라티에로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장 네이가우스(Jean Neuhaus)'와 그가 고안한 초콜릿 코팅, 성형 기술들.

    이러한 새로운 초콜릿 발명품들은 세계 각지에서 더욱 창의적이고 기발하며 환상적인 상품을 만들어내며 변해나갔고, 맛있는 '초콜릿 간식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혀를 사로잡은 '초콜릿 가문'들

    현재 대부분의 초콜릿은 대규모로 산업화 된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판매됩니다.

    그러나 과거 초콜릿 사업은 가족 규모로 조그맣게 구멍가게처럼 시작할 수 있는 가벼운 장사였습니다.

    1824년, '존 캐드버리(John Cadbury)'는 영국 잉글랜드에 카페를 열었습니다.

    카페에서는 홍차와 커피, 그리고 그만의 레시피로 제조한 초콜릿 음료를 판매했습니다.

    이것이 큰 인기를 끌게 되자, 캐드버리는 코코아 농장과 초콜릿 공장을 크게 열며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큰 인기를 얻은 캐드버리의 음료수와 초콜릿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존 캐드버리(John Cadbury)'와 그가 출시한 코코아 음료 상품 홍보 광고.

    1911년, '프랭크(Frank)'와 '에델 마스(Ethel Mars)'는 집에서 만든 수제 '버터 크림 캔디'를 미국에서 파는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초콜릿 장인 '프랭크 마스(Frank Mars)'와 그의 부인 '에델 마스(Ethel Mars)'.

    그들은 1923년, 프랭크가 '맥아 밀크 초콜릿 바(Malted milk chocolate bar)'를 발명해내어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폭신한 엿기름 누가(Nougat, 설탕이나 아몬드 등으로 만드는 캔디)를 만들어 카라멜을 얹은 뒤, 밀크 초콜릿으로 겉 표면을 코팅하여 감쌌습니다.

    프랭크 마스가 개발한 초콜릿 바의 초기 형태.

    1941년, 그들의 아들인 '포레스트(Forest)'가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합니다.

    설탕이 코팅되어 손에서 녹아내리거나 묻어나지 않는 초콜릿 방울을 발명한 것입니다.

    미국인 '브루스 머리(Bruce Murrie)'와 '포레스트 마스(Forest Mars)'는 이 새로운 초콜렛 브랜드에 '마스와 머리의 초콜릿(Mars & Murrie)'이라는 뜻으로 'M&M'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브루스 머리(Bruce Murrie)'와 '포레스트 에드워드 마스 시니어(Forest Edward Mars Sr)'.
    그들의 발명품, M&M (Mars & Murrie) 초콜릿.

    현재 우리는 마스(Mars) 가문의 초콜릿을 세계 어디에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야인들이 힘들게 구하고 신성하게, 또는 귀히 여기며 어렵게 마시던 쓴 음료수였던 초콜릿이 대중들을 위한 간식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비록 고대 마야인들이 처음 코코아 열매에서 씨앗을 채취해 낸 그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초콜릿은 그들의 첫 코코아 농사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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