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역사] 친일파 매국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총정리
이것저것 포스팅하다 우연히 한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한말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 효황제를 중심으로 각부 대신들이 늘어서서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이게 다 누구일까요?
궁금해서 하나하나 찾아보았습니다.
1926년 4월 27일 동아일보 신문 해당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을 노리며 제국주의 야욕을 꿈꾸던 극악무도한 일본조차 차마 국가의 주권을 통째로 날름 빼앗는 것에 '이래도 되나'하고 망설이고 고민하고 있었던 1905년 11월 17일, 누구보다도 빠르게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자 앞장섰던 다섯명의 매국노 을사오적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독자적인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이 국가 통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끔 하면서 국가의 주권을 일본 손아귀에 넘겨버렸습니다.
1907년 6월, 을사조약에 의한 외교권 박탈이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자 했던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이 일본에 들통남에 따라 조선 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강제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을 옹립했으며,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이완용의 주도로 고종의 양위식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을 폐위시킨 날로부터 4일 뒤, 을사늑약 체결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07년 7월 24일, 정미칠적에 의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혹은 다른 말로 제3차 한일 협약(第三次韓日協約), 통칭 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군대를 해산당하고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구 통치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3년 뒤인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 일명 경술국치(庚戌國恥) 사건이 발생하며 대한제국은 국가로서의 모든 권리를 일본의 손아귀에 넘기며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왕족들과 친일파 관리, 귀족, 양반 등은 추후 일본의 귀족 등급제에 따라 작위를 수여받으며 일본 정부를 구성하는 요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최초 다섯명 밖에 안되었지만 국가의 최고 수반이었던 친일파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기로 마음먹은 1905년의 그날로부터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은, 4년 9개월 만인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국가로서의 권리를 모두 빼앗기고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1. 을사오적(乙巳五賊) 5인
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입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국가의 기본권인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1.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당시 나이 47세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이가 완용)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습니다.
2.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당시 나이 40세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한규설(을사늑약을 반대한 애국자)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사돈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근택에게 한규설의 딸을 따라온 교전비(여종)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들고있던 칼을 집어던진 뒤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집니다.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3.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당시 나이 35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종손이며 고종의 5촌 조카입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나라를 판 돈을 도박에 탕진했다고 전해집니다.
'산홍'이라는 기생에게 첩이 되어달라고 구애했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라며 거절당하는 굴욕을 받았습니다.
4.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당시 나이 47세
1909년 이완용이 고종 양위 사건으로 인해 노상에서 이재명 의사에게 자격(刺擊, 칼로 찌르는 공격)당하여 입원하자 박제순이 임시내각총리대신 서리가 되었습니다.
1910년 8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 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 장지연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 박제순의 친손자 박승유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당시 나이 51세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를 지낸 충장공 권율의 9대손인 아버지 권홍섭(權弘燮, 1823 ~ 1893. 4. 24)과,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인 어머니 덕수 이씨(1820 ~ 1877. 9. 4)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쉽게 말해 권율 가문과 이순신 가문의 결합이라고 보면 됩니다.
친가와 외가 전부 일본에게서 나라를 지킨 충신 가문인 집안에서 왜란기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게 부역한 매국노가 나온 셈으로 호부견자(虎父犬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정미칠적(丁未七賊) 7인
정미칠적(丁未七賊)은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 24일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의 일곱 친일파를 말합니다.
정미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국가 내정과 관리 임명권 등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본권 대부분을 일본에게 빼앗겼습니다.
1.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당시 나이 49세
2.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당시 나이 50세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은 사건으로 유명한 친일파입니다.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입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도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완용 쪽을 더 이용해 먹었습니다.
더구나 송병준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이완용보다 더욱 지독한 친일파인 셈입니다.
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송병준이 술을 먹고 궁녀가 탄 기차 칸에 침입하여 여성들을 성희롱 하다가 당시 시종 무관이었던 '어담'과 드잡이를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송병준이 취하여 칼까지 빼어들자 그에 맞서 어담도 칼을 빼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습니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대신 사과했지만 이 사건이 기사화 되어 전국에서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에서 어찌 감히 난동을 부리는가' 하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3.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당시 나이 43세
1907년 7월, 군부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지시를 받고, 일본 헌병 70여 명을 대궐에 진입시켜 고종 황제를 강박해 선위를 강요하려다가 참령 임재덕이 일본군의 입궐에 완강히 항거하자 임재덕을 법원에 구속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습니다.
이때 고종 앞에서 칼을 들고 자기 목에 대는 시늉을 하며 겁박했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시기인 1907년 7월, 순종을 압박해 군대 해산 조칙을 받아낸 후 대한제국군을 해산했고, 이에 저항해 궐기한 군인과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는 등 국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부대를 탄압했습니다.
1907년 10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는데 일본 황태자 영접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습니다.
만평 《利劒一柄武士儀(리검일병무사의) - 벌거벗고 환도 찼군...》
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가인 관제 이도영(1884~1933)이 1909년 9월 2일자 <대한민보>에 기고한 만평으로 유명합니다.
제목의 볼드체의 한자를 이으면 '리병무'가 되는데, 당시 유명한 친일파 군인이었던 이병무를 조롱한 것입니다.
4.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당시 나이 58세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작위는 1916년 3월 장남 고희경이 세습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 최고령인 1849년생으로, 고종보다도 연상이었던 인물입니다.
반면 최연소 매국노는 윤덕영(1873년생)입니다.
5.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당시 나이 47세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하사받은 조중응은 조선 왕조 시기의 인물임에도 본처를 두 명씩이나 두었습니다.
을미사변 연루 혐의를 받고 10년간 일본에서 지낼 때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사실 한국에 본처가 있어서 논란을 빚은 것입니다.
정실 부인을 서울에 두고 일본 망명 중 일본인과 중혼한 뒤 귀국 시 대동해 와서 큰 말썽을 빚었다가, 고종의 중재 하에 두 부인을 모두 정실부인으로 삼아 함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6.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당시 나이 48세
이재곤은 촌수로는 아주 멀지만 고종과 같은 항렬의 왕실 종친입니다.
이재곤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이었던 사람은 300년 전 임금인 선조라서 이 시기에 그와 그의 일가는 원칙적으로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 이재완이 고종의 사촌이 되면서 이재곤 역시 자연스럽게 고종과 가까운 친척 형제로 지냈고 이후 사실상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습니다.
광나루(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거대한 별장을 갖고 있을만큼 호화롭게 살다가 광복 2년 전인 1943년 7월 11일에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4남 이관용과 5남 이순용은 친일파인 아버지와 다르게 독립운동가가 되었습니다.
7.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 당시 나이 47세
1911년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빛나고 빛날지니! 아. 천년 만년이여라는 「합병 기념 축사」를 게재하여 일제의 조선 지배와 일본 천황을 찬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죽기 전까지 떵떵거리며 살다가 1919년 2월 12일 사망했습니다.
3. 경술국적(庚戌國賊) 8인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이완용의 처남인 승녕부총관 조민희 여덟 명의 친일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리게 되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한민족의 나라 대한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어 국가로서의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일본의 일부 지방이 되어버렸습니다.
1.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당시 나이 52세
2.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 당시 나이 37세
3.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당시 나이 52세
이완용과 함께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인물로 1905년 7월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려 교섭에 나선 인물입니다.
1909년 1월 17일 이토와 친일 대신들은 남방 순행이라는 명목으로 순종을 부산까지 데리고 가 일본으로 납치하려 했는데, 순종이 부산항에 닿자 부산에 사는 일반인들과 상인들 수 만 명이 항구에 열을 지어 늘어서서 어가를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순종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타려고 할 때 부산의 항민들은 모두 5척~6척의 배를 몰아 군함을 둘러싸고 "폐하께서 만약 일본에 건너가신다고 할 것 같으면 신 등은 일제히 물 속에 뛰어들어 죽으면 죽었지, 차마 우리 황제께서 잡혀 가시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순종의 납치를 막았습니다.
4.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당시 나이 61세
5.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당시 나이 52세
6.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당시 나이 50세
7.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李秉武) 당시 나이 46세
8. 승녕부총관 조민희(趙民熙) 당시 나이 51세
조민희는 이완용의 처남이기도 하며, 을사조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조병세의 5촌 조카이기도 합니다.
그는 심각한 도박 중독 때문에 말년에나마 어느정도 매국의 대가를 치른 인물입니다.
일제가 준 은사금 덕분에 재산이 적지 않았으나 도박과 낭비로 탕진하고 1920년대에는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23년 중순경부터 채권자들의 소송이 계속 이어지는 한편 파산 신청에 대한 재판에도 20여 차례나 소환에 불응해 조선귀족 최초로 구인장(체포영장의 전단계, 법원 출두 명령서)을 받았습니다.
1925년 10월경에 기록된 조선총독부 문서의 조선귀족 약력에는 도박 현행범으로 여러 번 검거되었지만 조선귀족이라는 이유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더 심하게는 관아 역소 등에 출근해서도 사무실에서 도박장을 개설해 밤을 새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자로 선고받았고 1928년 2월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조선 귀족에 대한 예우가 정지되었습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속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영희의 아들, 조선귀족 고희경(高羲敬)
정미칠적이자 동시에 경술국적인 고영희의 장남 고희경(1873~1934)과 손자 고흥겸(1893~1939) 모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후손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 등을 국가에 몰수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희경의 후손들은 선조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고희경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매각한 대금 4억 8천여만 원을 국가에 반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일도 존재하는군요.
후손들의 결정이 쉽지 않았을텐데 깔끔한 과거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선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친일 매국행위로 얻은 부를 깨끗이 국가에 도로 반환하였다면, 과연 누가 이분들을 친일파의 후손이라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반면 고영희의 증손자 고중덕은 조상의 토지를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왕족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의양군 이재각은 1874년(고종 11년) 한성부 계동 은전궁에서 완평군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항렬로는 조선 헌종, 고종의 동생 뻘이나, 나이는 조카 뻘인 순종과 동갑이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물밑에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한국 황족 최초로 유럽에 간 기록을 세웠는데,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특명 영국 대사에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거쳤던 것입니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고,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재각은 다른 왕족들처럼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른 왕족들처럼 이왕가(李王家) 내의 많은 행사들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도박으로 그 많던 재산을 거의 다 잃고 가난하게 보내다 1935년 5월 11일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습니다.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이유.jpg
-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오적
-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긴 정미7조약에 서명한 정미칠적
- 한국이 완전한 식민지가 되도록 한일강제병합늑약에 협조한 경술국적
이 세 가지 전부에 속한 유일한 트리플 그레이트 시발놈이기 때문
친일파 매국노 새끼들은 다 알겠는데, 사진 속 나머지 인물들은 누구인가?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 효황제 이척(李坧)
어머니 명성황후 민씨의 극진한 양육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부터 몸이 약했던 순종은 성인이 된 후 '독살 미수 사건'을 겪으며 그렇잖아도 안 좋던 건강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고종과 순종이 함께 커피를 마시는 때를 맞춰 커피에 아편을 넣어 올린 것입니다.
커피 애호가 였던 고종은 그 날 따라 커피 맛이 이상하다고 느껴 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아편을 넣은 것도 모른채 무심코 다량을 복용하는 바람에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순종은 며칠 동안 혈변을 누는 등 건강을 크게 해쳤고, 젊은 나이에 치아 상당수가 빠져서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습니다.
틀니를 낀 탓에 하관이 커졌고,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약간 어벙해보이게 된 데다 이 사건까지 겹쳐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순종의 입지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왕이 되었고, 고종 사후에 복벽주의 독립 운동 세력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인기와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순종이 성불구였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순종의 몸에 이상이 있기 때문에 자손을 못 본다'는 말이 그 당시 조선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추원 의장 김윤식 대감(金允植 大監)
례식원(예식원) 참서관 고의성(高義誠)
사진 속 유일한 왜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
라인 압박 총무상‥알고보니 이토 히로부미 후손 (2024.05.10/뉴스데스크/MBC) MBCNEWS
여담
역시 이정도 센스와 순발력은 있어야 걸그룹 아이돌 하는구나...
일본에서도 조롱받았던 호색한 변태새끼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생전 여자를 너무 심하게 밝혔던 이토 히로부미는 경악스럽게도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변태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로 이토의 여색 밝힘은 유명했습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을 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취와미인슬, 성장천하권 / 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라는 한시를 남긴 적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대중들에게는 네 번이나 일본의 총리대신 직을 역임하고 초대 조선 통감으로 악명을 떨친 정치가로 인식하기 보다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재명(李在明) 의사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혐의로 곧 재판정에 섰으며, 공판에서 일본의 악행을 꾸짖고 이완용을 찌른 것이 의거였다며 스스로 변호했습니다.
다음은 이재명 의사가 일본을 꾸짖은 내용입니다.
재판정에서 이재명은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라며 고함을 쳤다.
재판장이 다시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2천만이다!"라고 답하자 창밖에서 "옳소!"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한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 선고가 확정된 뒤,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습니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忠魂),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10년 9월 30일, 이재명 의사는 수감되어있던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이재명 의사 의거 터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80 가톨릭회관 명동대성당 앞
하나하나 찾아보다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사진 속 맨 왼쪽의 인물은 관련된 기록이 없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끝까지 못찾을 줄 알았는데, 결국 구글신의 도움으로 이 인물들이 누구인지 모두 찾아내고야 말았네요.
이 사진 한장에 구한말과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전부 다 들어있는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한국이 당연히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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