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식, 증권, 경제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역사] 친일파 매국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총정리

by luckykorean 2024. 6. 21.

목차

    [사진으로 보는 역사] 친일파 매국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총정리

    이것저것 포스팅하다 우연히 한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촬영된 순종 황제 서북 순행 기념 사진.

    이것은 구한말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 효황제를 중심으로 각부 대신들이 늘어서서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이게 다 누구일까요?

    궁금해서 하나하나 찾아보았습니다.

    1926년 4월 27일 동아일보 신문 기사 속에 나온 순종 황제 서북 순행 사진 해설.

    1926년 4월 27일 동아일보 신문 해당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사진설명 : 사진은 경술(1910년) 전년(前年), 즉 메이지 42년(1909년) 이 왕(李 王) 전하께옵서 남북 순수(순방, 순행)을 마치시고 인정전 앞에서 기념촬영 하신 것인데, 중앙이 이 왕 전하를 향하여 전하의 좌편(왼쪽)으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요, 중앙 전하로부터 향하여 우편(오른쪽)으로 이재각, 민병석, 이재곤,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의성이요, 전하의 뒤는 향하여 바른편(오른쪽)이 이병무, 외인편(왼쪽)이 윤덕영.
    그래도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어찌어찌 잘 버텨나가고 있었던 대한제국이 1905~1910년 사이 단 5년만에 망해버린 이유가 이 한장의 사진 속에 모두 담겨있다.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을 노리며 제국주의 야욕을 꿈꾸던 극악무도한 일본조차 차마 국가의 주권을 통째로 날름 빼앗는 것에 '이래도 되나'하고 망설이고 고민하고 있었던 1905년 11월 17일, 누구보다도 빠르게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자 앞장섰던 다섯명의 매국노 을사오적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독자적인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이 국가 통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끔 하면서 국가의 주권을 일본 손아귀에 넘겨버렸습니다.

    1907년 6월, 을사조약에 의한 외교권 박탈이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자 했던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이 일본에 들통남에 따라 조선 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강제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을 옹립했으며, 1907년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이완용의 주도로 고종의 양위식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을 폐위시킨 날로부터 4일 뒤, 을사늑약 체결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07년 7월 24일, 정미칠적에 의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혹은 다른 말로 제3차 한일 협약(第三次韓日協約), 통칭 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군대를 해산당하고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구 통치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3년 뒤인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 일명 경술국치(庚戌國恥) 사건이 발생하며 대한제국은 국가로서의 모든 권리를 일본의 손아귀에 넘기며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왕족들과 친일파 관리, 귀족, 양반 등은 추후 일본의 귀족 등급제에 따라 작위를 수여받으며 일본 정부를 구성하는 요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최초 다섯명 밖에 안되었지만 국가의 최고 수반이었던 친일파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기로 마음먹은 1905년의 그날로부터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은, 4년 9개월 만인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국가로서의 권리를 모두 빼앗기고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1. 을사오적(乙巳五賊) 5인

    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명의 매국노를 일컫는 말입니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국가의 기본권인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1.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당시 나이 47세

    을사오적 이완용(李完用)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이가 완용)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습니다.

    2.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당시 나이 40세

    을사오적 이근택(李根澤) - 사진에 없음.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한규설(을사늑약을 반대한 애국자)의 딸이 이근택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서 사돈 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이근택에게 한규설의 딸을 따라온 교전비(여종)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 꾸짖기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들고있던 칼을 집어던진 뒤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집니다.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3.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당시 나이 35세

    을사오적 이지용(李址鎔)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종손이며 고종의 5촌 조카입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나라를 판 돈을 도박에 탕진했다고 전해집니다.

    '산홍'이라는 기생에게 첩이 되어달라고 구애했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라며 거절당하는 굴욕을 받았습니다.

    4.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당시 나이 47세

    을사오적 박제순(朴齊純)

    1909년 이완용이 고종 양위 사건으로 인해 노상에서 이재명 의사에게 자격(刺擊, 칼로 찌르는 공격)당하여 입원하자 박제순이 임시내각총리대신 서리가 되었습니다.

    1910년 8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 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 장지연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 박제순의 친손자 박승유

    5.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당시 나이 51세

    을사오적 권중현(權重顯)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를 지낸 충장공 권율의 9대손인 아버지 권홍섭(權弘燮, 1823 ~ 1893. 4. 24)과,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인 어머니 덕수 이씨(1820 ~ 1877. 9. 4)사이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쉽게 말해 권율 가문과 이순신 가문의 결합이라고 보면 됩니다.

    친가와 외가 전부 일본에게서 나라를 지킨 충신 가문인 집안에서 왜란기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게 부역한 매국노가 나온 셈으로 호부견자(虎父犬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정미칠적(丁未七賊) 7인

    정미칠적(丁未七賊)은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 24일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의 일곱 친일파를 말합니다.

    정미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국가 내정과 관리 임명권 등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본권 대부분을 일본에게 빼앗겼습니다.

    1.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당시 나이 49세

    정미칠적 이완용(李完用). 또 너야?

    2.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당시 나이 50세

    정미칠적 송병준(宋秉畯)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은 사건으로 유명한 친일파입니다.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입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도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완용 쪽을 더 이용해 먹었습니다.

    더구나 송병준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이완용보다 더욱 지독한 친일파인 셈입니다.

    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송병준이 술을 먹고 궁녀가 탄 기차 칸에 침입하여 여성들을 성희롱 하다가 당시 시종 무관이었던 '어담'과 드잡이를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송병준이 취하여 칼까지 빼어들자 그에 맞서 어담도 칼을 빼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습니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대신 사과했지만 이 사건이 기사화 되어 전국에서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에서 어찌 감히 난동을 부리는가' 하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3.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당시 나이 43세

    정미칠적 이병무(李秉武)

    1907년 7월, 군부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지시를 받고, 일본 헌병 70여 명을 대궐에 진입시켜 고종 황제를 강박해 선위를 강요하려다가 참령 임재덕이 일본군의 입궐에 완강히 항거하자 임재덕을 법원에 구속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습니다.

    이때 고종 앞에서 칼을 들고 자기 목에 대는 시늉을 하며 겁박했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시기인 1907년 7월, 순종을 압박해 군대 해산 조칙을 받아낸 후 대한제국군을 해산했고, 이에 저항해 궐기한 군인과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는 등 국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부대를 탄압했습니다.

    1907년 10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는데 일본 황태자 영접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습니다.

    만평 《劒一柄武士儀(검일병무사의) - 벌거벗고 환도 찼군...》

    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가인 관제 이도영(1884~1933)이 1909년 9월 2일자 <대한민보>에 기고한 만평으로 유명합니다.

    제목의 볼드체의 한자를 이으면 '리병무'가 되는데, 당시 유명한 친일파 군인이었던 이병무를 조롱한 것입니다.

    4.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당시 나이 58세

    정미칠적 고영희(高永喜)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작위는 1916년 3월 장남 고희경이 세습했습니다.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 최고령인 1849년생으로, 고종보다도 연상이었던 인물입니다.

    반면 최연소 매국노는 윤덕영(1873년생)입니다.

    5.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당시 나이 47세

    정미칠적 조중응(趙重應)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하사받은 조중응은 조선 왕조 시기의 인물임에도 본처를 두 명씩이나 두었습니다.

    을미사변 연루 혐의를 받고 10년간 일본에서 지낼 때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사실 한국에 본처가 있어서 논란을 빚은 것입니다.

    정실 부인을 서울에 두고 일본 망명 중 일본인과 중혼한 뒤 귀국 시 대동해 와서 큰 말썽을 빚었다가, 고종의 중재 하에 두 부인을 모두 정실부인으로 삼아 함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6.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당시 나이 48세

    정미칠적 이재곤(李載崑)

    이재곤은 촌수로는 아주 멀지만 고종과 같은 항렬의 왕실 종친입니다.

    이재곤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이었던 사람은 300년 전 임금인 선조라서 이 시기에 그와 그의 일가는 원칙적으로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 이재완이 고종의 사촌이 되면서 이재곤 역시 자연스럽게 고종과 가까운 친척 형제로 지냈고 이후 사실상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습니다.

    광나루(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거대한 별장을 갖고 있을만큼 호화롭게 살다가 광복 2년 전인 1943년 7월 11일에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4남 이관용과 5남 이순용은 친일파인 아버지와 다르게 독립운동가가 되었습니다.

    7.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 당시 나이 47세

    정미칠적 임선준(任善準)

    1911년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빛나고 빛날지니! 아. 천년 만년이여라는 「합병 기념 축사」를 게재하여 일제의 조선 지배와 일본 천황을 찬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죽기 전까지 떵떵거리며 살다가 1919년 2월 12일 사망했습니다.

    3. 경술국적(庚戌國賊) 8인

    경술국적(庚戌國賊)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에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이완용의 처남인 승녕부총관 조민희 여덟 명의 친일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리게 되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한민족의 나라 대한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어 국가로서의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일본의 일부 지방이 되어버렸습니다.

    1.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당시 나이 52세

    경술국적 이완용(李完用). 동시에 을사오적, 정미칠적이다. 야이 ㄱㅅㄲ야 너 트리플 크라운이다!

    2.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 당시 나이 37세

    경술국적 윤덕영(尹德榮). 한일합방조약의 조약문이 완성되고 황제의 재가를 받기 위해 옥새를 찍기만 하면 대한제국이 와르르 무너지고 일본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결정적인 순간, 순정효황후는 도저히 그 꼴을 바라보지 못하고 어전에서 옥새를 빼앗아 자신의 치마폭 안에 깊숙이 숨겨버렸다. 왕실의 여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기만 해도 목숨이 달아날 수 있었던 왕정제 시대, 그 어느 누가, 어찌 감히 황후의 치마를 들춰보고 손을 더듬어 다리 사이를 헤집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윤덕영은 포악무도하게도 치맛자락에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옥새를 숨기고 있었던 순정효황후의 치맛속에 기어코 그 추악한 손을 집어넣어 옥새를 빼앗은 후 순종의 손에 쥐여준 뒤, 옥새를 쥐며 덜덜 떨고있는 순종의 손을 강제로 잡고 억지로 도장을 찍게하였다. 심지어 윤덕영은 황후의 큰아버지였고, 순정효황후는 조카딸이었다. 그야말로 이완용을 능가하는 그레이트 시발놈 그 자체인 것이다.
    국권 포기를 강요하던 이완용은 고종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결단코 반대하는 고종황제의 의지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덕영은 궁중 물건에 차압용 빨간 딱지를 붙이고, 폭언과 협박을 일삼으며 고종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윤덕영의 집착과 집요함에 두 손을 든 고종은 그를 만나는 것이 꺼려져 아들인 순종에게 만나게 했는데,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조차 윤덕영의 냉혹함과 집요함에 치를 떨었는데 지금까지 그 욕을 다 먹는 건 총리대신으로써 합병 문서들에 서명을 한 이완용이다. 이 일의 대가로 윤덕영은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윤덕영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상당히 많이 닮긴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윤덕영은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 일대가 본관인 해평 윤씨, 윤석열 대통령은 경기도 파주 일대가 본관인 파평 윤씨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고조부는 윤자홍(尹滋洪, 1852~1901), 증조부는 윤상년(尹相年, 1873~1911), 조부는 윤호병(尹浩炳, 1898~1946), 부친은 윤기중(尹起重, 1931~2023)이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안에는 친일파도 많고 독립운동가도 많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느쪽일까?

    3.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당시 나이 52세

    경술국적 민병석(閔丙奭)

    이완용과 함께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인물로 1905년 7월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 왕실의 최고 고문으로 초빙하려 교섭에 나선 인물입니다.

    1909년 1월 17일 이토와 친일 대신들은 남방 순행이라는 명목으로 순종을 부산까지 데리고 가 일본으로 납치하려 했는데, 순종이 부산항에 닿자 부산에 사는 일반인들과 상인들 수 만 명이 항구에 열을 지어 늘어서서 어가를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순종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타려고 할 때 부산의 항민들은 모두 5척~6척의 배를 몰아 군함을 둘러싸고 "폐하께서 만약 일본에 건너가신다고 할 것 같으면 신 등은 일제히 물 속에 뛰어들어 죽으면 죽었지, 차마 우리 황제께서 잡혀 가시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순종의 납치를 막았습니다.

    4.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당시 나이 61세

    경술국적 고영희(高永喜). 동시에 정미칠적이기도 하다.

    5.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당시 나이 52세

    경술국적 박제순(朴齊純). 동시에 을사오적이다.

    6.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당시 나이 50세

    경술국적 조중응(趙重應). 동시에 정미칠적이다.

    7.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李秉武) 당시 나이 46세

    경술국적 이병무(李秉武). 동시에 정미칠적이다.

    8. 승녕부총관 조민희(趙民熙) 당시 나이 51세

    경술국적 조민희(趙民熙).

    조민희는 이완용의 처남이기도 하며, 을사조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조병세의 5촌 조카이기도 합니다.

    그는 심각한 도박 중독 때문에 말년에나마 어느정도 매국의 대가를 치른 인물입니다.

    일제가 준 은사금 덕분에 재산이 적지 않았으나 도박과 낭비로 탕진하고 1920년대에는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23년 중순경부터 채권자들의 소송이 계속 이어지는 한편 파산 신청에 대한 재판에도 20여 차례나 소환에 불응해 조선귀족 최초로 구인장(체포영장의 전단계, 법원 출두 명령서)을 받았습니다.

    1925년 10월경에 기록된 조선총독부 문서의 조선귀족 약력에는 도박 현행범으로 여러 번 검거되었지만 조선귀족이라는 이유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더 심하게는 관아 역소 등에 출근해서도 사무실에서 도박장을 개설해 밤을 새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1927년 12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자로 선고받았고 1928년 2월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조선 귀족에 대한 예우가 정지되었습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속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영희의 아들, 조선귀족 고희경(高羲敬)

    왼쪽은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인 슈퍼 더블 시발놈 아버지 고영희(高永喜), 오른쪽은 아들인 조금 덜 시발놈 조선귀족 고희경(高羲敬). 부자가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정미칠적이자 동시에 경술국적인 고영희의 장남 고희경(1873~1934)과 손자 고흥겸(1893~1939) 모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후손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 등을 국가에 몰수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희경의 후손들은 선조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고희경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매각한 대금 4억 8천여만 원을 국가에 반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일도 존재하는군요.

    후손들의 결정이 쉽지 않았을텐데 깔끔한 과거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선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친일 매국행위로 얻은 부를 깨끗이 국가에 도로 반환하였다면, 과연 누가 이분들을 친일파의 후손이라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반면 고영희의 증손자 고중덕은 조상의 토지를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왕족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

    완평군의 3남 의양군 이재각은 고종과 같은 항렬의 왕족이다. 출생년도는 1974년으로 순종과 같은 나이이지만, 나이와 관계 없이 항렬상 순종 황제의 아버지 뻘인 아저씨인 것이다. 역시 후손은 없다.

    의양군 이재각은 1874년(고종 11년) 한성부 계동 은전궁에서 완평군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항렬로는 조선 헌종, 고종의 동생 뻘이나, 나이는 조카 뻘인 순종과 동갑이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물밑에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한국 황족 최초로 유럽에 간 기록을 세웠는데,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특명 영국 대사에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거쳤던 것입니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고,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재각은 다른 왕족들처럼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른 왕족들처럼 이왕가(李王家) 내의 많은 행사들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도박으로 그 많던 재산을 거의 다 잃고 가난하게 보내다 1935년 5월 11일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습니다.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이유.jpg

    1.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오적
    2.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긴 정미7조약에 서명한 정미칠적
    3. 한국이 완전한 식민지가 되도록 한일강제병합늑약에 협조한 경술국적

    이 세 가지 전부에 속한 유일한 트리플 그레이트 시발놈이기 때문

    친일파 매국노 새끼들은 다 알겠는데, 사진 속 나머지 인물들은 누구인가?

    글씨에 빨간물이 들어가지 않은 분들은 친일파가 아니다. 이름이 빨간색으로 쓰여진 놈들은 전부 왜놈이거나 친일파 빨갱이 새끼들이다. 일부러 빨간색으로 썼다. 지옥에서나마 재수 없으라고.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 효황제 이척(李坧)

    순종(純宗) 효황제(孝皇帝) 이척(李坧). 1874년생으로 사진이 찍혔던 1909년 당시 35세였다. 자손은 없다.

    어머니 명성황후 민씨의 극진한 양육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부터 몸이 약했던 순종은 성인이 된 후 '독살 미수 사건'을 겪으며 그렇잖아도 안 좋던 건강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고종과 순종이 함께 커피를 마시는 때를 맞춰 커피에 아편을 넣어 올린 것입니다.

    커피 애호가 였던 고종은 그 날 따라 커피 맛이 이상하다고 느껴 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아편을 넣은 것도 모른채 무심코 다량을 복용하는 바람에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순종은 며칠 동안 혈변을 누는 등 건강을 크게 해쳤고, 젊은 나이에 치아 상당수가 빠져서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습니다.

    틀니를 낀 탓에 하관이 커졌고,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약간 어벙해보이게 된 데다 이 사건까지 겹쳐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순종의 입지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왕이 되었고, 고종 사후에 복벽주의 독립 운동 세력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인기와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순종이 성불구였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순종의 몸에 이상이 있기 때문에 자손을 못 본다'는 말이 그 당시 조선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추원 의장 김윤식 대감(金允植 大監)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문인, 학자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강한 어조로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후 조선귀족으로 추대되어 편히 살 수도 있었지만 1919년 일본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올리고,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조선귀족이었지만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작위를 박탈당한 행적으로 인하여 각종 친일파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였음에도 독립운동가로 등록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례식원(예식원) 참서관 고의성(高義誠)

    례식원 참서관 고의성(高義誠). 그의 다른 사진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1903년 8월, 예식원 참서관이었던 고의성은 고종의 명을 받아 주일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대한제국의 독자적 외교권과 중립성을 요구하는 서찰을 가지고 일본에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의 행적에 대한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사진 속 유일한 왜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등박문)

    제1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작가님 죄송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이 ㄱㅅㄲ 이거 무라카미 하루키랑 왜 이렇게 닮았어!
    1909년 10월 26일,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의병장,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1910년 경 뤼순감옥에 수감 중이던 안중근 의사. 의사(義士)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폭압에 맞서 무력으로 항거한 사람을 뜻한다. 열사(烈士)는 맨몸으로 저항한 사람을 말하며, 지사(志士)는 의사와 열사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의무이다." - 도마 안중근 (1879~1910, 향년 31세)
    항일의병장 도마 안중근 선생은 본인이 스스로 몸을 바쳐 한민족의 숙적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조국을 구해내는 임무를 수행하셨다.
    누구처럼 자신의 진급과 윗선에 샤바샤바 손바닥을 비벼대기 위해 지휘하에 있는 병사를 무리한 작전으로 밀어넣어 죽음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의병대장 본인이 직접 죽음을 각오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전장으로 뛰어든 것이다.
    전시나 비상사태도 아닌 평시 상황인데, 불어난 물로 인한 급류가 위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병대가 구조활동을 하고있다'는 것을 생색내기 위해, 위험한 수상 구조작전에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고 새파랗게 젊은 병사를 사지로 밀어넣은 것에 대해 멍청한 명령을 내린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자결해서 순국한 병사의 부모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사죄해야 한다. 만약 정말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무리한 명령을 내린 것이라면, 자신의 출세와 진급, 일신의 영달과 보신만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귀한 남의 자식 목숨을 빼앗아 간 살인마 주제에 태연하게 이따위 개소리를 지껄여선 안되는 것 아닌가? 부하에게만 죽음을 강요하지 말고, 대장 본인이 목숨을 내놓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참된 군인의 자세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백년 전에 안중근 선생님에게 배웠다. 군대 훈련은 최대한의 '생존'을 보장하고 최대, 최장기간 '전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국가가 필요로 할 때 군말없이 죽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이 자(者)의 발언은 그야말로 카미카제 정신을 이어받은 일본 황군이나 할법한 소리이다. 지금 국가는 그대의 죽음을 원한다. 온 국민이 그대의 죽음을 바란다. 그대는 조국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바라는대로 군말없이 국가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가? 者는 '놈 자' 자이다.

    라인 압박 총무상‥알고보니 이토 히로부미 후손 (2024.05.10/뉴스데스크/MBC) MBCNEWS

    여담

    역시 이정도 센스와 순발력은 있어야 걸그룹 아이돌 하는구나...

    일본 예능 나간 르세라핌한테 들어온 질문...
日本バラエティー初出演!
LESSERAFIM
Gyoret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인은 누구예요?
MC :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인은 누구예요?
日本バラエティー初出演!
다들 ㅈㄴ 고민..
    HUH YUNJIN
日本バラエティー初出演!
time
LESSERAFIM
エンジン HUH YUNJIN
미야와키 사쿠라
윤진 : 미야와키 사쿠라! (같은 멤버 중 일본인)
    화기애애~
ㄹㅇ 순발력, 센스 쩌는듯...
킹갓제너럴갓기천재아이돌박지성의팬 3일 전
역시....아이돌 센스는... 나는 순간 당황해서 이토히로부 미라고 말하고 담날 눈물의 기자회견했다
1.1만
    그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은 누구예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이토 히로부미를 떠올리고 만다. 그의 이름은 그만큼 한민족 역사상 가장 강렬하게 한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굴욕적인 굴종의 역사로 피와 뼈에 아로새겨진 치욕적이고도 모욕적인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조롱받았던 호색한 변태새끼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女ずき者の最後(호색한의 최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로 사망할 당시의 풍자화로, 그림자가 女의 형상을 하고 있다. - 출처 : 곳케이 신문(滑稽新聞), 1903. 09. 05.
    明治好色一代男, 食道樂, 大勳位伊藤侯爵.(메이지 호색 일대 남자, 식도락, 대훈위 이토 후작) 여승(女僧)을 포함하여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손을 대려 했던 변태 이토 히로부미의 여성 편력을 조롱한 그림이다. - 출처 :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2006)

    생전 여자를 너무 심하게 밝혔던 이토 히로부미는 경악스럽게도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변태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로 이토의 여색 밝힘은 유명했습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을 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취와미인슬, 성장천하권 / 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라는 한시를 남긴 적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대중들에게는 네 번이나 일본의 총리대신 직을 역임하고 초대 조선 통감으로 악명을 떨친 정치가로 인식하기 보다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재명(李在明) 의사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鍾峴天主敎會堂, 현 서울 명동성당)에서 같은 달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오전 11시 30분경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는 이완용을 보고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떨어지자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이완용을 본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이 죽었다고 판단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거사 직후, 일본 순사의 칼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것이 한국에서 시행된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 제1호 수술이다.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인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 의술의 발전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
    매국노(賣國奴)이자 국적(國敵) 이완용은 비록 이날 쓰러지지 않고 무려 16년이나 더 살아 1926년 2월 11일 향년 67세로 사망하였지만, 이재명 의사의 의거로 인해 폐에 상처를 입어 살아있는 내내 끔찍한 폐렴과 천식으로 고통받다 지독한 고열과 혼수상태 속에서 그 비열한 인생의 막을 내렸다. 국가와 민족을 팔아넘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역적은 다행히도 그렇게 비참하게 사망하였다.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파묘하여 봉분을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다. 이완용의 관뚜껑은 모 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같은 우봉 이씨인 역사학자 이병도 씨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의 묘소 자리에는 아직까지도 종종 식칼이 꽂힌다고 한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혐의로 곧 재판정에 섰으며, 공판에서 일본의 악행을 꾸짖고 이완용을 찌른 것이 의거였다며 스스로 변호했습니다.

    다음은 이재명 의사가 일본을 꾸짖은 내용입니다.

    재판정에서 이재명은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라며 고함을 쳤다.

    재판장이 다시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2천만이다!"
    라고 답하자 창밖에서 "옳소!"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한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 선고가 확정된 뒤,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습니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忠魂),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10년 9월 30일, 이재명 의사는 수감되어있던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서울시 명동성당 앞에 위치한 이재명의사의거터(李在明義士義舉址, Site of the Heroic Deed of the Martyr Yi Jaemyeong) 기념비. 이재명(1890~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李完用)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이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

    이재명 의사 의거 터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80 가톨릭회관 명동대성당 앞

    이재명 의사는 진안 이씨, 정치인 이재명 대표는 경주 이씨로 본관과 집안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이재명 의사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재명 씨와 한글 이름 뿐만 아니라 한자 이름도 '李在明'으로 똑같으며, 이재명 의사의 의거일인 12월 22일은 정치인 이재명 씨의 호적상 생년월일이다. 얼굴도 어딘지 모르게 닮았는데,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다.

    하나하나 찾아보다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사진 속 맨 왼쪽의 인물은 관련된 기록이 없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끝까지 못찾을 줄 알았는데, 결국 구글신의 도움으로 이 인물들이 누구인지 모두 찾아내고야 말았네요.

    이 사진 한장에 구한말과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전부 다 들어있는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한국이 당연히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세계관
     

    한국이 당연히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세계관

    한국이 당연히 일본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세계관 2021년 7월 별~을 좋아하는 표도기 @pyodogi 님이 트위터 X에 작성한 장문의 글로 스압이 심합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독특한 세

    lovelykorean.tistory.com

    단기, 불기, 공기, 서기 연도 계산법과 기원전, 기원후, BC, AD 뜻
     

    단기, 불기, 공기, 서기 연도 계산법과 기원전, 기원후, BC, AD 뜻

    단기, 불기, 공기, 서기 연도 계산법과 기원전, 기원후, BC, AD 뜻대한민국에서 국가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연도 표기법은 서기(西紀)입니다.도시에서는 대부분 서기를 사용하고 있는데요.그러나

    cutekorean.tistory.com

    전 대통령 후보 현 민주당 대표 이재명 살인미수사건 총정리
     

    전 대통령 후보 현 민주당 대표 이재명 살인미수사건 총정리

    전 대통령 후보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 살인미수사건 총정리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계획살인을 목적으로 한 흉기 피습을 당한지 약 8시간 만에 안정을 되찾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

    lovelykorean.tistory.com

    [참담] 2024년 6월 6일 현충일 부산 고층 아파트에 내걸린 욱일기.jpg
     

    [참담] 2024년 6월 6일 현충일 부산 고층 아파트에 내걸린 욱일기.jpg

    [참담] 2024년 6월 6일 현충일 부산 고층 아파트에 내걸린 욱일기.jpg" data-ke-type="html">HTML 삽입미리보기할 수 없는 소스욱일기가 게양된 해당 호실의 현관문 상태" data-ke-type="html">HTML 삽입미리보기

    beautifulkorean.tistory.com

    2024.04.09 - [주식, 증권, 경제 이야기] - [펌] 인터넷 친일파 매국노 일뽕들의 특징.txt

     

    [펌] 인터넷 친일파 매국노 일뽕들의 특징.txt

    [펌] 인터넷 친일파 매국노 일뽕들의 특징.txt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면서 일진이 자기를 괴롭힌 덕분에 맷집이 세진건 인정 못함. 일본이 한국보다 강대국이기

    luckykorean.tistory.com

    반응형